SF, 즉 Science Fiction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천 개의 파랑
을 읽으면서 SF 소설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대부분의 SF는 100년 후와 같이 먼 미래를 상정하거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기술을 가진 평행우주의 내용을 다루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 30년 정도의 가까운 미래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비슷해서 오히려 독특하게 느껴졌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마치 이웃집에서 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재를 잠시 제쳐두면 대부분의 줄거리는 사람간의 애정과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힐링소설의 틀을 갖고 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삭막한 인간관계에서 온기는 가지지 않지만 따뜻한 정신을 가진 안드로이드 로봇이 그들을 맺어준다. 촉각을 지니지 못해 체온과 공기도 느낄 수 없지만 깊은 마음을 가진 콜리
를 보다보면,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인간은 표현하지 않으면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는데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달하지 못하는 우리가 더 로봇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어랏 이런 말은 ‘콜리’에게 실례려나…?)
수미상관을 이루며 마무리짓는 소설의 결말이 잘 이어졌지만, 의문점이 드는 부분들이 많았다. 너무 현실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공식적으로 퇴역된 ‘콜리’가 경마 대회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고, ‘투데이’라는 말의 마지막 경주인데, 콜리가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그리고 내용 중간에 ‘소방관(남편)이 아이를 가졌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하는 부분에서 몰입이 확 깨졌다. 애초에 남성이 임신과 출산이 불가능한데 굳이 그런 내용을 집어넣었어야 했나? 그 정도 미래면 인공자궁이 가능하다고 보는게 낫지 않나 싶었다.
‘이런 소설도 SF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청소년 소설’에 SF라는 소스를 얹은 것 같은 이질감이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장애’와 ‘애정’, 그리고 ‘로봇 윤리’ ‘동물 윤리’를 짧은 소설에 다 집어넣으려다보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굉장히 모호하다고 느껴졌다. (솔직히 왜 베스트셀러에 등극한지 잘 모르겠어…)